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티 누르할리자 (문단 편집) === 2집 활동과 [[인도네시아]]로의 진출 === [[파일:external/sitisentral.weebly.com/4702648_orig.jpg]] 1997년 1월 27일 2집을 발표했고, 이번에는 1집에 비해 판매량은 반으로 줄어들었으나, 이것이 곧 인기가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. 오히려 인기가 더 올랐으면 올랐지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. 다른 가수들에게서는 거의 없었던 유례없는 전곡 히트를 달성하면서,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른 가수들을 뺨치는데 성공했다.[* 이전에도 [[파우지아흐 라티프]]가 6집 [[Epilog Memori Gelita(앨범)|Epilog Memori Gelita]]로 전곡 히트를 달성한 적은 있었지만,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.] 그 중에서 "Aku Cinta Padamu"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Anugerah Juara Lagu에서 다시 우승했고, [[셀린 디온]]의 팝송 "The Colour Of My Love"를 리메이크해 불렀으며 이 역시도 나름 주목을 받았다. 현지 [[중국인]] 가수 [[치앙 텡]]과 듀엣으로 부른 "Rindu Di Antara Kita"의 [[중국어]] 파트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.[* 그러나 [[말레이인]]의 [[중국어]] 발음은 원어민 못지 않게 뛰어나서,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. 물론 그 반대로 [[중국인]]의 [[말레이어]] 발음은 아주 꽝이지만...] 특히나 데뷔한지 딱 1년이 되었던 1997년 4월 이웃나라 [[인도네시아]]의 잡지 "POS Kota"에 소개되었고, 이후 곧바로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. 물론 [[엘라 아미누딘]]처럼 이전에도 인도네시아로 진출한 가수들은 적지 않았으나, 거기서는 얄짤것 없이 외국인인 말레이시아 가수들은 자국민 가수들에 훨씬 밀려 짤리기 일쑤였다. 그러나 시티는 자국의 그 어느 가수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, 이는 말레이시아 가요 vs 인도네시아 가요의 대결구도를 한편으로 낳게 되었다.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대도시들인 [[자카르타]], [[반둥]], [[욕야카르타]]에서 아예 외국인이 대형 콘서트를 열었으니, 시티의 인기가 인도네시아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. 그 덕에 2집부터 인도네시아에서 발매하기 시작했고,[* 단 트랙 순서와 구성은 상당히 다르다.] 말레이시아에서 4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보다 많은 50만장을 기록했다.[* 단, 인구 3'''천만'''의 말레이시아와 3'''억'''의 인도네시아의 인구대비를 보면, 말레이시아보다 판매량은 많았더라도 판매 비중은 훨씬 적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